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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

​황사영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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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이 1801년 2월부터 1801년 9월까지

은거하며 숨어서 백서를 작성했던 실제 토굴의 모습

<천주교 베론 성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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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토굴

 

1801년 2월 - 1801년 9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배론 마을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소재는 명주천이고,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세필로 쓴 글자 수는 122행, 13,384자다.

 

 이 백서는 첫째, 인사말(1-5행), 둘째, 신유박해의 진행과정(6-32행), 셋째, 순교자 열전(32-90행), 넷째,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8행), 다섯째, 관면요청과 맺음말(119-122행)로 되어 있다.

 

 백서가 중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편지 심부름을 맡았던 황심 토마스가 그 해 9월 15일 배론에서 체포되었고(10월 24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

 

황사영은 황심이 체포된 후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사 되었다. 6일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정명련)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다. 현재 백서의 원본은 로마 교황청 바티칸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백서 실제 원본크기

​<천주교 베론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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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Story

황사영은 누구인가

 

서울의 아현동에서 남인 시파에 속하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1790년은 ‘운명의 해’였다.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의 국왕인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탁용해 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정세에서 이는 그에게 출세와 부귀영화를 확실히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정명련과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결혼은 흔히 인생의 전환점이라 한다. 그는 결혼을 통해서 그 삶에서 진정한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의 처가 인척들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가 식구들을 비롯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인척들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승훈과는 사돈간이었고, 처삼촌인 정약종은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결혼 직후인 1790년에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했다. 이후 그는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오직 교리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는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영화의 길을 스스로 버렸고,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며 몇 푼 안되던 학전(學錢)에 기대어 사는 가난에 찌들린 훈장의 길을 택했다.

왜 작성되었나

 

황 알렉시오로 다시 태어난 그는 천주교 신앙이 성리학과는 달리 조선을 구원해 줄 새로운 사상임을 확인했고, 이를 전파하려고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교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정조 임금이 궂기신 뒤 일어난 천주교 박해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났다.이 박해 과정에서 그가 그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신앙은 모독을 당했다. 자신의 동료들은 하나씩 잡혀서 감옥에서 매맞아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그가 존경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신자들에게 무고한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관청에 스스로 자수하여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렇게 조선교회를 이끌던 이들이 삽시간에 죽음을 당했다. 이 박해를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지키고 재건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황사영에게 남겨졌다.황사영은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를 구우며 살아가던 제천 땅 배론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리고 토굴에 숨어서 박해에서 희생된 증거자들의 순교사실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의 재건책을 구상했다.그는 길이가 세 뼘, 폭이 두 뼘 정도 되는 비단폭을 구했다. 그리고 궁벽한 옹기점의 점인들에게서 구하기는 힘들었을 매우 가는 붓으로 먹을 찍어 깨알같은 글씨를 또박또박 써내려 갔다. 아마도 그가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할 때에도, 당시 선비들이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필통에 그 붓을 넣어 가지고 다녔던 듯하다. 황사영이 작성한 일종의 박해보고서요 청원서인 이 편지는 이렇게 작성되었다.황 알렉시오는 이 편지를 조선교회를 책임지던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일을 중국교회에 밀사로 파견된 바 있던 황심에게 맡기고자, 그를 배론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황심은 도중에 체포되었고, 그의 발설로 황사영의 피신처가 탄로났다. 의금부의 나장들은 득달같이 내달아 그를 체포했다. 그가 작성해 놓은 백서도 압수되었다.

백서(帛書)는 ‘비단에 쓴 글’이다. 한자문화권에서 고대사회로부터 쓰이던 보통명사였던 이 백서라는 단어 앞에 우리는 글쓴이 황사영의 이름을 붙여 특별히 다른 백서와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 황사영 백서가 로마 교황청 고문서고를 떠나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백서는 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이 그 박해 과정을 기록하고 교회 재건책을 논한 초기교회사 연구의 주요 자료다.

 

 

 

어떻게 전해졌나


남은 말

 

백서는 분명 먹으로 작성되었다. 해서체의 글씨로 쓰인 이 원본을 주의 깊게 보면 물기 때문에 글씨가 조금씩 번진 곳을 확인하게 된다. 그 잔잔한 번짐은 백서의 보관과정에서 생긴 흔적일 수도 있다. 또한 백서를 작성하며 황사영의 땀방울과 눈물이 적셔져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의 땀이며 눈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황사영은 간절한 눈물을 흘리며 백서를 작성했나 보다. 나는 물기에 얼룩진 그 백서의 진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전하고자 했던 그 진실은 오늘의 우리를 전율시킨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1년 9월호]

 

 

신유박해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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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고 백서 내용이 밝혀지자 조정이 경악했다. 백서에는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사 5-6만 명을 보내 조선에 무력으로 개교를 시도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서에서 박해의 경과를 보고한 부분보다는 오직 이 부분만이 강조되어 회자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흉서’로 규정했다. 일반 관리나 지방의 선비들은 이 반역적 내용에 격분했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황사영 백서 한글번역본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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