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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순조 1)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이 조선 천주교회의 참상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북경주교에게 보낸 비밀 서한

​황사영 백서

충북 베론성지의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했던 토굴에 있는 백서 사본

황사영 백서 (충북 베론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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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이 머물렀던 토굴 (충북 베론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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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알렉시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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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초상

주1

황사영 백서 현대어로 읽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編

 

주교님께 올리는 눈물의 호소

 

저희(원문: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저희를 돌보시는 주교님(탕사선湯士選, 포르투갈 출신 북경교구장 Alexandre de Gouvea의 중국식 이름)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지난봄 길을 떠난 사람을 통해 주교님께서 평안히 지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여러 달이 지나 이제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주님의 크신 은총 안에서 영육이 모두 평안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사목의 열매가 날로 더욱 풍성해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는 이를 생각할수록 더욱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와 문안을 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와 허물이 크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고,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아래로는 사람들의 신뢰마저 잃었습니다. 그 결과 박해가 크게 일어나 마침내 신부님(주문모周文謨)께까지 그 화가 미치고 말았습니다.

 

또한 저희는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목숨을 바쳐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감히 붓을 들어 주교님께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 성교(聖敎)는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신자들은 박해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의지하고 호소할 곳조차 없으며, 형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성교를 돌보고 이끌 사람이 없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으시며, 사목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토록 절박한 처지에서 저희가 달리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경과를 간략히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얽힌 사정도 매우 많아 간단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래에 차례로 자세히 적겠사오니,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해 이후의 참상과 구원을 청하는 호소

조선 교회의 상황

이제 성교는 무너져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희만이 다행히 화를 면하였고, 요한(옥천희, 若望)도 아직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이 나라에서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거하였고, 살아 있는 저희는 마땅히 죽음으로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부족하고 힘이 미약하여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저희는 몇몇 교우(황사영, 황심, 옥천희)와 함께 당면한 일을 깊이 의논한 끝에, 저희가 세운 계획을 아래에 조목조목 아뢰고자 합니다. 부디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는 저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속히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는 마치 흩어진 양 떼처럼, 어떤 이는 산골짜기로 몸을 숨기고, 어떤 이는 의지할 곳조차 없어 길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도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슬피 울 뿐입니다.

 

괴로운 마음은 뼛속까지 사무쳤습니다. 밤낮으로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주님의 전능하심과 주교님의 크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저희를 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해 주시고,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이 모든 환난에서 저희를 구하시어 다시 평온한 삶을 되찾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성교는 이미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 또한 돌이켜 생각하면, 누가 주님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멀고 외져 성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며, 백성들의 형편 또한 연약하여 오랜 시련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눈물과 근심 속에서 살아왔는데, 올해의 참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어찌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겠습니까? 이번 박해 이후에도 주님의 은총을 입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질까 두렵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합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들이 이 위태롭고도 비참한 사정을 듣는다면, 어찌 저희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바라오니, 이 사정을 교황님께 자세히 알리시고 여러 나라에도 널리 알려 주십시오. 또한 저희를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을 본받고, 성교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이를 사랑하시어 저희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며 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합니다. 오직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부디 주교님께서는 글로 다 아뢰지 못한 저희의 사정을 깊이 헤아리시어 가엾이 여겨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해의 시작

을묘년(1795), 주문모(周文謨) 신부님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끝내 놓치고 만 뒤부터, 선왕(정조)은 성교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날로 더해 갔습니다. 관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철저히 수색하였지만, 신부님에 관한 작은 단서조차 얻지 못했고 끝내 그 행방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록

이에 조화진이라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성교를 믿는 척하게 한 뒤, 호서 지방(충청도)의 성교 사정을 몰래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미년(1799) 겨울 청주에서 박해가 일어나, 충청도의 열성적인 교우들이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는 중인 출신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리를 중히 여겨 재물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교에 대한 열성이 남달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해년(1791) 박해 때 체포되어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성교를 배반하였습니다.

 

선왕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혼인을 허락하고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토마스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으나, 그 뒤로는 세상일을 멀리한 채,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언제나 목숨을 바쳐 그 죄를 보속하기를 바랐습니다.

 

기미년(1799) 8월, 선왕은 그를 갑자기 형조로 불러들여 물었습니다.

"네가 아직도 사학(邪學 ; 조선 조정이 천주교를 이단으로 여겨 부르던 명칭이다 )을 믿고 있느냐?"

토마스는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때가 왔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이제야말로 성교를 위해 죽을 때라고 생각하고, 성교의 충효를 밝히고 진리를 힘 있게 증언하며, 지난날 배교를 깊이 뉘우치는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당당하고도 힘이 있어 곁에서 듣던 사람들까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형조의 관리들은 크게 놀라고 노하여 그 사실을 곧바로 임금께 아뢰었으나, 선왕은 더 이상 형벌을 내리지 않은 채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를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토마스를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끝내 분명한 명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포용하려는 뜻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 일은 더 크게 번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중배 마르티노(李重培, 1801년 순교)는 소론 계열의 서출(庶出)로, 경기도 여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용맹하고 힘이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 또한 매우 호탕하였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김건순 요사팟(1775~1801)과 생사를 함께할 만큼 가까운 벗이었습니다. 김건순이 성교를 믿게 되자, 마르티노도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성교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열성으로 신앙을 지켰으며, 언제나 당당하고 담대하여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신년(1800) 부활절에는 개를 잡고 술을 마련한 뒤, 마을의 교우들과 함께 인적 드문 산골 길에 모여 앉았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희락경(부활 삼종기도)을 바치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하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음식을 나누었으며, 술을 마신 뒤에는 다시 노래하기를 거듭하여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얼마 뒤 원수처럼 지내던 집안의 고발로, 마르티노는 교우 열한 사람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함께 붙잡힌 교우들 가운데는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 마르티노의 격려와 권면에 힘입어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견디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석방되지 못한 채 옥에 갇혀 지내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노는 본래 의술을 조금 익혔으나 뛰어난 의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옥에 갇힌 뒤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한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효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일로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병자들이 찾아왔고, 옥문 앞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아 마치 장터를 이루는 듯하였습니다. 고을 군수도 이를 막지 않았으며, 자신도 병이 생기자 마르티노에게 치료를 청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옥중에서도 날마다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김건순은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마르티노의 치료 효과를 물으면, 지나친 칭찬으로 들릴까 염려되어 열 명 가운데 여덟이나 아홉은 낫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효험을 보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날 옥졸이 의술에 관한 책을 보여 달라고 하자, 마르티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이 없소. 다만 천주를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먼저 천주를 믿으시오."

옥졸이 다시 말하였습니다.

"책은 모두 불태워 버렸는데 무엇으로 배우란 말이오?"

그러자 마르티노는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내 가슴속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 책이 있소. 그 책 하나면 사람들을 가르쳐 성교를 믿게 하기에 충분하오."

 

함께 갇혀 있던 원요한(元景道, 1773~1801)에게는 나이 많은 여종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옥으로 찾아와 옥바라지를 하면서 집안 형편을 이야기하고, 거듭 성교를 버리라고 권하였지만 원요한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여종의 말이 너무도 간절하여 원요한이 잠시 집안을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마르티노는 그 여종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여종은 두려움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옥에 오지 않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생원님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 다시는 갈 수 없겠습니다."

마르티노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외우던 기도문과 교리문 등을 가리키는 말. 반드시 성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을 외우며, 성교의 진리를 풀어 설명하고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하였습니다. 그 결과 옥졸 한 사람도 마음을 움직여 성교를 믿게 되었고, 열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권철신 암브로시오(1736~1801)는 남인( 남인은 조선 시대 동인(東人)에서 갈라져 나온 정치 세력이다. 당시 남인 학자들 가운데에는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들이 적지 않았다 ) 명문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에 뛰어나 이름난 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성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지자 온 가족이 함께 성교를 믿고 따랐습니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만큼 성교를 믿게 되자 사람들의 비난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더욱이 그의 아우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1801)가 신해박해(1791) 때 순교한 뒤로는 더 이상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의 원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기미년(1799) 여름, 고향의 악의적인 무리들이 사실을 왜곡하여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권씨 집안 사람들도 맞서면서 사건이 크게 번질 형세가 되었으나, 당시 군수가 현명하게 판단하여 공정하게 처리한 덕분에 그들의 모함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계략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무리들과 결탁한 그들은 경신년(1800) 5월 직접 선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양근 고을에는 사학(邪學)이 크게 퍼져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마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군수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조금도 단속하지 않으니, 마땅히 그를 문책하고 징계해야 합니다."

 

선왕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였고, 결국 양근 군수는 문책을 받고 스스로 벼슬을 내놓았습니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곧바로 옛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많은 사람을 체포하였습니다.

 

권철신은 나이가 많았고 체포된 뒤의 일을 염려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그러자 관가에서는 그의 아들을 대신 붙잡아 가두었습니다. 아들은 여러 차례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청하였지만, 군수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끝내 권철신을 잡아들이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오랫동안 마무리되지 못하였습니다.

 

선왕은 성교를 몹시 의심하고 경계하기는 하였지만, 본디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주문모 신부님을 체포하려다 실패한 사건(1795)은 청나라와의 관계까지 얽혀 있었으므로, 자칫 일이 드러날 경우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을묘년(1795) 이후 여러 신하들이 성교를 엄하게 금할 것을 거듭 청하였지만, 선왕은 모든 일을 담당 관리들에게 맡긴 채 겉으로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일어난 박해는 모두 은밀한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선왕이 일부러 모르는 체한 것도 교우들의 경계를 늦추게 하여 주문모 신부님을 은밀히 붙잡고 일을 마무리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이루기도 전에 선왕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여삼(?~1801, 신유박해의 밀고자)은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형제 셋이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서울로 옮겨 살았으나, 뒤에는 신앙을 저버리고 불량한 무리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의 두 형도 끝내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한편 이안정이라는 사람도 충청도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법 재산이 있었으며 김여삼과는 사돈 사이였습니다. 집이 가난했던 김여삼은 늘 그의 도움을 바랐지만, 이안정은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김여삼은 마음속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안정은 늘 성사를 받고 있었는데, 이를 안 김여삼은 '신부님께서 안정에게 내게 재산을 나누어 주라고 권하시면, 그는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안정도 끝내 여삼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김여삼은 분노를 신부님께 돌려 모함할 마음을 품었고, 마침내 주문모 신부님의 행적을 포도청에 밀고하였습니다.

 

포도청에서는 오랫동안 신부님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김여삼에게 말했습니다.

"일이 성공하면 너를 좋은 벼슬에 천거하겠다.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당시 신부님께서는 강완숙 골롬바(1760~1801 ;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 보호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여성 신자이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의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김여삼도 이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포도청과 날짜를 정하여 알려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날이 되기 전에 김여삼이 다른 집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포도청 사람들은 약속한 날 그의 집을 찾아왔지만 허탕만 치고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이 사실을 알게 된 한 교우가 곧바로 신부님께 알렸고, 신부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셨습니다. 또한 이안정은 수십 관의 돈을 마련하여 김여삼과 화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김여삼의 원망은 잠시 누그러졌고, 며칠 지나지 않아 선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각 관청이 국상(國喪)으로 분주해져 더 이상 사건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여삼은 이미 밀고한 뒤였기에 스스로 물러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악한 무리들과 끊임없이 모의하며 끝내 신부님을 해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약 200년 전부터 여러 당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해 왔습니다. 당시에는 남인·노론·소론·소북의 네 당파가 있었는데, 선왕(정조) 말년에 이르러서는 남인도 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에는 이가환(1742~1801), 정약용 요한(1762~1836), 이승훈 베드로(1756~1801), 홍낙민 루가(1740~1801)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때 성교를 믿었지만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배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을 버렸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젠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따르는 사람은 매우 적어 그 세력은 외롭고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반면 홍의호(1758~1826), 목만중(1727~?) 등은 성교를 진심으로 배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두 세력은 서로 깊은 원한을 품고 대립하였습니다.

 

노론 또한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시파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가까이에서 보필한 세력이었고, 벽파는 당론을 앞세워 임금의 뜻에도 맞서곤 하였습니다. 두 세력은 서로 원수처럼 대립하였지만, 벽파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선왕조차 이를 쉽게 누르지 못하였고, 근년에는 조정의 여론도 대부분 그들에게 기울어 있었습니다.

 

이가환은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정약용은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을묘년(1795) 이전까지는 선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는 점차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벽파는 이 두 사람을 끝내 해치려 하였습니다.

 

이가환 등은 이미 배교하여 성교를 버렸는데도, 벽파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사당으로 몰아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번번이 그들을 감싸 주었으므로, 벽파도 마음대로 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이 승하하자 어린 임금(순조)이 왕위를 이었고,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조모였으며 본래 벽파와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친정은 일찍이 선왕 때 가문이 몰락하는 큰 화를 입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왕대비는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드러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벽파를 앞세워 거리낌 없이 정사를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신년(1800) 11월,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파 인물들을 조정에서 거의 모두 몰아내어 조정의 절반 가까이가 비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성교를 박해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벽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세가 크게 바뀌자 그들은 기회를 얻었다고 여겨 더욱 기세를 올리며 성교를 크게 탄압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한편 명도회에 가입한 교우들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힘썼고, 회원이 아닌 교우들도 자진하여 성교를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 결과 그해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신자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새로 입교한 사람 가운데 약 3분의 2는 부녀자였고, 나머지 3분의 1은 평민과 천민이었습니다. 반면 사대부 집안의 남성들은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성교를 믿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을묘년(1795) 박해 때 강완숙 골롬바는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뛰어난 재능으로 교회 일을 훌륭히 맡아 많은 사람을 감화시켰으며, 특히 양반가의 부녀자들이 성교를 믿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역적죄가 아닌 이상 양반가의 부녀자에게까지 형벌을 내리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님께서도 이러한 사정을 활용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중심은 점차 여성 교우들에게로 옮겨 갔고, 성교도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신유박해의 시작

성교는 이미 나라의 큰 문제로 떠오른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새 임금(순조)이 즉위하면 가장 먼저 성교에 대한 조처가 내려질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처가 내려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더욱 몸을 삼가셨고, 교우들 또한 모두 마음속으로 근심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12월 17일, 형조에서는 포졸을 보내 최필공 토마스를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뜻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부터 그의 사건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성교를 단속하기는 하였지만, 조정에서 아직 엄격한 금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도 경계는 하였지만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았습니다.

 

12월 19일, 성헌당 첨례일(주님 봉헌 축일) 새벽이었습니다. 최토마스의 사촌인 최베드로(1769~1801)는 길가 약방의 안쪽 방에서 몇몇 교우들과 함께 경문(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마침 밖에서는 투전을 단속하던 관리 한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가슴 치는 소리를 투전판에서 장단을 맞추는 소리로 오해하여 창문을 열고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도박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은 사람들을 한 명씩 수색하던 끝에 첨례단(교회 축일표)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글을 몰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기에 글을 아는 관리에게 가져가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성교와 관련된 문서임을 알게 되자 곧바로 다시 돌아와 교우들을 붙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날이 밝아 다른 교우들은 모두 흩어져 피하였고, 베드로와 오스테파노 두 사람만 남아 있다가 붙잡혀 토마스와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포도청에서는 김여삼과 서울의 불량배들을 앞세워 교우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온 서울을 샅샅이 뒤지며 교우들을 수색하였고, 교회 안은 마치 끓는 물처럼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연말이 되어 관청의 일이 바빠지면서 박해는 잠시 주춤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아흐레(1801년 1월 9일), 명도회 총회장 최창현 요한(1754~1801)이 체포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포도청 관리들은 밤낮없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교우들을 잡아들였고, 포도청과 형조의 감옥에는 붙잡힌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 입교한 신자나 평범한 부녀자, 또는 교리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신앙이 굳센 교우들은 아직 많지 않았습니다.

 

금교령

정월 열하루, 대왕대비는 성교를 엄금하는 교서를 반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선왕께서는 늘 "올바른 학문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사학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서울은 물론 경기와 충청 지방에까지 날로 더욱 퍼지고 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서울과 지방에서는 오가작통법(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한 제도)을 엄격히 시행하여, 한 통 안에 사교를 믿는 사람이 있으면 통장이 반드시 관가에 신고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라.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죄를 물어 모두 사형에 처하고 그 씨까지 남기지 말라.“

 

이 교서가 내려지자 온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박해는 더욱 거세졌고, 교우들은 몸을 숨길 곳조차 찾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명도회장 정아우구스티노(정약종 1758~1801 순교자)는 정약용의 셋째형입니다. 전에는 양근에서 살다가 경신년(1800) 5월 박해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전부터 사교를 믿는다는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경신년 여름 한 고약한 관리가 선왕의 면전에서 그를 지명하여 주살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이 꾸짖어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는 이 때 세상이 이미 크게 달라져 박해의 불길이 날로 거세지는 것을 보고, 자신 또한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지고 있던 성물과 책, 신부님의 편지 등을 나무 궤짝 하나에 담아 다른 집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마저 발각될까 염려되었습니다. 또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다시 자기 집으로 옮기려 하였지만, 부장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임토마스라는 사람을 시켜 나무 장수로 가장하고 궤짝을 마른 솔잎으로 덮어, 19일 석양 무렵에 짊어지고 거리로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궤짝은 크고 솔잎은 엷어서 아무래도 땔 나뭇짐 같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한성부의 별육(몰래 도살한 쇠고기) 단속하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그것이 밀도살한 쇠고기가 아닌가 의심하여 임토마스를 관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궤짝을 열어보니 모두가 가톨릭 신앙에 관한 책과 성상과 신부의 편지였으므로 한성부의 관리들이 크게 놀라 마침내 궤짝과 사람을 다 포도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이 일은 박해에 불을 지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이 들어 있던 궤짝이 압수된 뒤 교우들은 모두 놀라 몸을 떨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했는데, 십여 일이 지나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잠잠하였습니다.

 

2월 초에 포도대장 이유경이 다른 직책으로 옮겨가고, 새로 임명된 신대현이 집무하자 옥에 가득차 있던 배교한 사람들을 죄다 석방하고 오직 최토마스 형제와 최요한과 임토마스만 석방하지 않았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장차 곤장을 맞아 죽게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혹은 멀리 귀양보낼 의논을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관가의 검거도 잠시 멈추자 교우들은 기뻐하였고, 이대로 아주 아무 일이 없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 때 소북의 박장설, 노론의 이서구, 남인의 최현중 등이 계속해서 상소하여, 극단적으로 교회를 비방하면서 역률로 논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울러 신대현이 교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것을 죄로 몰아 논란하였습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신대현을 다른 관청으로 넘겨 가두게 하고, 포도청에 가두어 두었던 네 사람을 금부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법은 조정의 신하와 역적의 죄는 금부에서 다스리고, 포도청에서는 오로지 도둑을 관장하고, 서민의 죄는 형조에서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은 다 서민이어서 포도청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도둑에게 적용하는 법률( 도율(盜律): 도둑에게 적용하는 형률 )로 다스리고, 금부로 옮겨간 자는 역율(역적에게 적용하는 형률)로서 논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금부로 하옥시키고,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을 체포하였으며 한편, 포도청에 단단히 경계하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게 하고, 아울러 여주와 양근에 가두어 둔 여러 사람을 금부로 압송해 오니, 서울과 지방의 이름 있는 교우는 한 사람도 이 난을 모면한 이가 없었습니다.

 

길에는 나졸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고 널려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금부와 양 포도청과 형조의 옥은 모두 빽빽이 차서 더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24 일 골롬바의 온 가족이 체포되었고, 그 후로 사대부집 부녀자도 체포된 이가 많았습니다만 자세히 들은 바는 없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관가에 이르러, 관리가 궤짝 안에 들어 있던 책들의 출처를 묻자, 아우구스티노는 모두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리는 농 속의 편지를 내어놓고 하나하나 캐어물었으나, 아우구스티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사람을 보내 가족에게 묻기를 "너희 남편이자 아버지는 신부의 이름과 계신 곳만 말하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너희는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해서 사실대로 말하여라.“하였지만 가족들은 한결같이 모두 모른다고만 대답하였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들

이에 조정 대신들의 회의에서는 이들을 대역부도죄로 판결하였습니다. 26일에 아우구스티노와 최요한, 최토마스, 홍프란치스코사베리오(洪敎萬 1737~1801 순교자), 홍낙민, 이승훈, 여섯 사람을 모두 참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아홉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는데, 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골롬바이고 다른 두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남자 여섯 사람 역시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최베드로 등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는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어서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주와 양근에 갇혀 있던 교우들(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임희영)은 다시 본래 고을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아직 자세한 사실은 확인하지 못하여 한 사람씩 기록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총회장 최창현 요한은 중인으로, 을묘년(1795)에 순교한 최마티아(崔仁吉 瑪弟亞 1764~1795 순교자)와 같은 집안의 조카뻘 친족( 같은 집안의 조카 또는 조카뻘 친족을 이르는 말 )이었습니다.

그는 성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라 성교가 전해지자 누구보다 먼저 입교하였습니다. 인품은 온화하고 원만하였으며, 언행은 20년 동안 하루같이 올바르고 한결같았습니다. 겉모습에서도 순수한 인품이 드러났고, 말은 간결하면서도 바르고 힘이 있었습니다. 누구든 의심이나 환난으로 마음이 무거울 때 그의 얼굴만 보아도, 눈앞의 어려움도 그리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몇 마디만 듣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하게 풀렸으며, 신앙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의 가르침은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록 듣기 좋게 꾸며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어 누구나 즐겨 들었고 싫증 내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듣는 이들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사람들에게 겸손한 태도는 그의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으므로,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흠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입정동에 살았기 때문에 교우들은 그를 '관천'이라는 호로 불렀습니다.

 

조화진은 충청도를 염탐하던 중 최관천이 교우들의 지도자임을 알았으나 단지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러 최요한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으로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 정월 초닷샛날 몸이 좋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었는데 초아흐렛날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청 관리를 데리고 들이닥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 여 일 후에 치도곤 열세 대를 맞았습니다. 매를 맞는 동안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형벌이 끝난 뒤 관리가 죄목을 읽자 벌떡 일어나 교회의 십계명을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부모에게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잠들어 있을 때에는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소?" 하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명령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뒤에 아무런 소식을 못 듣겠더니, 정아우구스티노와 같은 날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였습니다.

한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성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고, 무엇에서나 자상하고 세밀한 것이 남보다 뛰어났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선도를 익혀 오래 사는 길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한때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면 신선도 결국 사라진다고 보는 '천지개벽설'을 믿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탄식하며 말하였습니다. "천지가 변하고 바뀔 때에는 신선도 없어짐을 면하지 못하니, 이것 또한 영원히 사는 길이 될 수 없다." 그러던 중 마침내 가톨릭 신앙을 듣게 되었고, 그는 독실하게 믿으며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구들 중에서 믿음이 온전한 사람이 드물었는데, 오직 그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일에는 서툴렀지만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강론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비록 병들어 고통을 겪거나 굶주려도 그 괴로움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이치가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말을 타거나 배를 타고 있을 때에도 언제나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또 어리석고 깨우침이 없는 사람을 만나면, 목이 쉬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르치면서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그와 함께 지내면 깨우침을 얻지 못하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찍이 그는 글을 모르는 교우들을 위해 한글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여러 교리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설명을 더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썼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아이도 책을 펼쳐 보기만 하면 쉽게 뜻을 알 수 있었고,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부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이 책을 우리나라 교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 여기시고 간행을 허락하셨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는 오랫동안 깊이 학문을 닦아 그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교우를 만나면 안부만 간단히 나눈 뒤 곧바로 강론을 시작하였고, 하루 종일 가르치느라 다른 이야기를 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새로운 진리를 한두 가지라도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을 크게 기뻐하며 찬탄하였습니다. 반대로 신앙이 식어 강론 듣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으면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는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막힘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차근차근 설명하였고, 말이 끊기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설명은 논리가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며, 깊고도 날카로워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사랑의 실천을 더욱 북돋아 주었습니다.

비록 덕망은 최관천에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성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만큼은 그보다 더욱 뛰어났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는 천주님의 덕과 교리가 매우 넓고 깊은데도 여러 책에 흩어져 있어 배우는 사람들이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리서를 모아 주제별로 정리한 『성교전서』를 편찬하려 하였습니다. 이 책을 훗날 성교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남겨 주고자 하였으나, 초고도 절반을 채 마치기 전에 박해를 당하여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관리들은 왕명을 받들어 그를 심문하였습니다. 그는 성교의 참된 진리를 분명히 밝히고, 성교를 금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왕명에 맞섰다며 크게 노하여 그를 대역부도죄로 다스렸습니다.

 

그는 옥에서 끌려 나와 사형수레에 올라 형장으로 향하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천주님을 위해 죽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우리가 흘린 눈물은 참된 기쁨으로 바뀌고, 여러분의 웃음은 큰 슬픔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비웃지 마십시오."

또 처형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도 두려워하지 말고 훗날 본받아 실천하십시오."

칼이 한 번 내리쳐지자 머리와 몸이 거의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크게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최필공 토마스도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고 병약하였으며,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기력이 크게 쇠하여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를 때에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장에 가까워지자 비로소 얼굴에 평안과 기쁨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때 나이는 쉰여섯 살이었습니다.

 

홍교만 사베리오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현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뒤늦게는 경학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고향 사람들에게 성교를 전하여 많은 이를 신앙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한 고을 교우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부터 남들의 비방을 받아왔는데 이 때에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홍낙민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는 이승훈, 정약용과 벗이 되어 지냈습니다.

 

갑진년(1784) 을사년(1785) 사이에 성교를 믿고 따르기 시작하여 열심으로 성교의 도리를 밝히고 큰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과거 시험도 계속 치렀고, 기유년(1789)에는 마침내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까지 올랐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 때 선왕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배교하였고, 그 뒤로는 신앙인으로서의 삶도 크게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전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지마는 바오로만은 날마다 기도를 바치고 교회의 금육과 재계도 계속 지켰습니다. 을묘년(1795) 성사를 행할 때에는 보례(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 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예식)를 받아 고해를 준비하였으나 미처 판공할 때가 이르기 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의 고발장에 들어 있어서 또 선왕에게 배교하라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 처형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도 두려워하지 말고 훗날 본받아 실천하십시오."

칼이 한 번 내리쳐지자 머리와 몸이 거의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크게 십자 성호를 긋고 조용히 쓰러졌습니다.

 

최필공 토마스도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고 병약하였으며, 오랫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기력이 크게 쇠하여 형장으로 가는 수레에 오를 때에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장에 가까워지자 비로소 얼굴에 평안과 기쁨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때 나이는 쉰여섯 살이었습니다.

 

홍교만 사베리오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현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뒤늦게는 경학을 좋아하였는데 권씨 집안에서 성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습니다. 그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고향 사람들에게 성교를 전하여 많은 이를 신앙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한 고을 교우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딸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과 혼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부터 남들의 비방을 받아왔는데 이 때에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홍낙민 바오로는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는 이승훈, 정약용과 벗이 되어 지냈습니다.

 

갑진년(1784) 을사년(1785) 사이에 성교를 믿고 따르기 시작하여 열심으로 성교의 도리를 밝히고 큰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과거 시험도 계속 치렀고, 기유년(1789)에는 마침내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까지 올랐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 때 선왕의 강압적인 명령으로 배교하였고, 그 뒤로는 신앙인으로서의 삶도 크게 흐트러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전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였지마는 바오로만은 날마다 기도를 바치고 교회의 금육과 재계도 계속 지켰습니다. 을묘년(1795) 성사를 행할 때에는 보례(성세성사나 혼인성사 등 성사예식 집행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는 예식)를 받아 고해를 준비하였으나 미처 판공할 때가 이르기 전에 박해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의 고발장에 들어 있어서 또 선왕에게 배교하라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후로부터는 집에 있을 때는 계명을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지켰으며 밖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지냈습니다. 기미년(1799)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지마는 그는 신주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와서 신앙의 열정이 다시 되살아나 장차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가려 하였으나 이 거룩한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함께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옥안의 사정을 엄중히 비밀에 붙여 자세히 알 수 없지마는 짐작컨대 그의 죄명은 본래 중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만약 잡혀가서 배교하였더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참형을 당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그가 성교를 거스르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가환의 생질이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매형입니다. 젊어서 진사시에 올랐고 본래부터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여 포의(벼슬하지 않거나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로 있던 이벽(1754~1786 세자요한)이 크게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 이벽은 몰래 성교에 관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승훈은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계묘년(1783)에 이승훈이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되자 이벽이 은밀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 서양 사람인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 부만 구해달라고 하며, 아울러 세례 받기를 청한다면 그 서양 선교사는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그러므로 반드시 서양의 진귀한 물건들도 많이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청하니까 여러 신부들은 세례에 필요한 성교의 요점과 이치에 밝지 못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오직 양신부(梁棟材 그라몽신부 1736~1812 프랑스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만이 힘써 주장하여 세례를 주고 더불어 성교에 대한 책을 많이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으로 돌아와 이벽 등과 함께 책을 차분히 읽으며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친한 친구들에게 권하고 교화시켜 당시 이름난 선비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그들은 승훈을 교우들의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뒤에 그의 아버지가 성교를 엄중히 금하고 나쁜 친구들은 마구 그를 비방하였지만 승훈은 오히려 참아 견디며 성교를 받들었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1790) 가을에 음직(과거를 보지 않는 대신에 조상의 음덕으로 하는 벼슬)에 임명하여 벼슬이 평택 현령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1791)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여러 번 성교를 헐뜯는 글을 썼으나 다 자기의 본심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1795)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되어 박해가 일어나 승훈은 승훈은 두려워 다시 몸을 숨기듯 조심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성교에 대한 책을 전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성교에 대한 공박과 배척은 반드시 그 죄가 승훈에게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은 매번 그를 두둔하고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승훈은 겉으로는 비록 세속을 따랐지마는, 혹시 옛날에 함께 신앙을 지키던 벗을 만나면 간절한 정을 못잊어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나려고 생각하다가 이에 이르러 화를 입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교에 관한 서적을 전한 죄가 있어서 비록 다시 배교한다 하더라도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아야 할지는 앞으로 더 사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가환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고, 성장해서는 풍채가 늠름하고, 태도가 대단히 훌륭하였습니다. 문장은 온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뛰어나 마치 신의 경지와 같았습니다.

 

또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통하여 일찍이 그는 탄식하며, 자기가 죽고 나면 이 나라에서 기하학은 그 근본이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의 학문을 다소 믿던 그는 매번 하늘을 쳐다보고 속으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처럼 크고 넓은 세상에 어찌 이를 다스리시는 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말 하였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서 진사에 오르고 대과에 급제하였는데 선왕은 그의 큰 그릇을 알아보고 깊이 신임하였습니다.

 

갑진, 을사년 무렵에 이가환은 이벽등이 성교를 믿고 따른다는 말을 듣고 책망하며 말하기를 "나 역시 『직방외기』, 『서학범』 같은 서양 서적 몇 권을 보았소. 그러나 그런 책은 신기한 이야기를 담은 이색적인 책 정도로만 여겼소. 식견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벽이 하나하나 이치를 들어 설명하니 가환이 말이 막혀 마침내 책을 가져다 자세히 읽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벽은 기본 교리책(天學初函 : 명나라 말 이지조가 편찬한 천주교 관계 총서) 중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 때『성년광익』(☞천주교 성인전) 한 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성스러운 기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니까 가환은 기어코 달라고 하였습니다. 가환은 이벽이 그때 가지고 있던 성교 서적을 모두 가지고 가서 정신을 가다듬어 되풀이해 읽어보고는 성교를 믿기로 뜻을 결심하고

 

"이것이야말로 참된 진리요 바른 길이다. 만일 이 말이 거짓이라면, 하느님께서 어찌 서양 선교사들을 그대로 두셨겠는가. 벌써 하늘의 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제자들을 권하여 교화하고 이벽 등과 아침저녁으로 몰래 토론하며 신앙을 배우는 데 큰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때 이승훈 등이 감히 성사를 행하였는데 가환은 다른 사람에게 권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게 하였으나 자기는 그러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사신이 되어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세가 어려워짐을 보고는 마침내 교우들과 함께 드리던 기도도 중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교를 믿는다고 비방을 받는 사람은 가환의 일가친척들이 많았으므로 성교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항상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몰아 배척하였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때 그는 광주 부윤이 되어 성교를 강하게 탄압하여 자신에게 쏟아지는 의심을 벗어나려 했습니다. 교우들을 도둑에게 적용하는 형률로 다스리기 시작한 것도 가환으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신해년(1791) 이후에 선왕이 남인을 많이 등용하자 가환은 기회를 타 여러 높은 벼슬을 역임하고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을묘년(1795)에 세 사람(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관련하여 처형된 지황, 윤유일, 최인길을 말함)이 순교한 후에 악한 무리들은 신부의 일은 모르고 그 죄를 이승훈과 이가환에 뒤집어씌우고, 글로써 번갈아 공격하였으므로 선왕도 어찌할 수 없이 승훈을 예산으로 귀양 보내고 가환을 충주 목사로 좌천시켰습니다.

 

충주에 어떤 교우가 있어 전부터 남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아 왔는데, 가환은 그를 혹독한 형벌로 다스리며 협박하여 배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교우에게 '주리(周牢)'라는 혹독한 형벌을 교우들에게 처음 사용한 것도 이가환이었습니다. 또한 관청의 기생을 첩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짓은 다 자기에게 대한 비방을 벗으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버림받고 다시 등용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집에 들어앉아 글을 짓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원래 성교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여 딸과 며느리, 첩과 여종에게까지 신앙을 전하였습니다. 성교 서적이 드러나더라도 가환은 이를 조사하거나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무오년(1798)과 기미년(1799) 사이에 그는 지방에서 박해가 잇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자기의 소신을 말하기를, "재를 막대기로 치면 칠수록 더 흩날리듯, 박해도 하면 할수록 성교는 더욱 퍼질 것이오. 주상께서 아무리 금하려 하셔도 끝내 막지는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금부에 잡혀 들어갔을 때에는 오히려 스스로를 변명하고 죄를 승복하지 아니하였으나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 평시에 그를 원망하고 시기하던 자들이라 기필코 사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므로, 그 스스로도 끝내 면할 수 없음을 깨달아 마침내 자신의 참된 믿음을 숨기지 않았으며, 죽기까지 그 믿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던 중 그만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때 나이 60세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권철신도 역시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기에, 여러 자료와 증언을 더 폭넓게 살펴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판단을 미루고자 합니다.

 

최필제 베드로는 자(字)가 자순이며, 최토마스의 사촌 동생(종제從弟)이었습니다. 집안은 가난하고 부모는 연로하였기 때문에 약을 팔아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그의 약은 값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고 찾았습니다. 그는 진실하고 온화한 인품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사람들은 그를 한 번만 보아도 어진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최토마스 역시 뜻이 높고 기개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늘 베드로를 깊이 존중하였습니다. 비록 나이가 어린 사촌 동생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먼저 그의 의견을 묻고 난 뒤에야 결정하였으며,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최토마스에게는 친동생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천주교를 비난하고 교우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헐뜯었지만, 유독 최필제 베드로만은 감히 비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천주교 신자 가운데 자순(최필제)만큼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고, 그 밖에는 본받을 만한 사람이 없다."며 칭찬하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도 일찍이 그를 크게 칭찬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부부가 정결을 지키며 평생 살아가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자순 부부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뜻이 더욱 굳어지고, 신앙생활에도 더욱 힘쓰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다.”

 

최필제가 체포된 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는데, 아들이 잡혔다는 소식에 큰 충격과 근심으로 병이 들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는 마침내 천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뒤 평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옥에 있던 최베드로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청에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관청에서는 집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라고 허락하면서, 다시 돌아오지 말고 그대로 달아나라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약속한 기한 안에 스스로 옥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최베드로는 일찍이 친구들과 서로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그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최베드로가 매질을 견디지 못해 한때 배교하였으나, 관청에서 석방하지 않자 다시 신앙을 증언하다가 사형을 당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확실한 근거가 없어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건순 요사팟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홉 살 때에는 이미 신선의 도를 배우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글방에서 『논어』를 배우다가 ‘귀신 (오늘날의 '유령'이나 '악귀'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조상의 혼령이나 제사의 대상이 되는 영적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중국 고전의 표현이다 )을 공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는 구절에 이르러 훈장에게 물었습니다.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해서는 안 되고, 멀리해야 한다면 공경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라고 합니까?"

훈장은 끝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집에는 오래전부터 『기인십편』(☞마테오 리치가 불교와 비교하여 천주교를 설명한 책)이 있었는데, 요사팟은 이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열다섯 살 무렵에는 『천당지옥론』이라는 글을 지어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존재함을 논하였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문학과 유교 경전은 물론 역사서와 제자백가, 의학, 지리까지 두루 익혔으며, 불교와 도교, 병법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습니다.

 

열여덟 살에 양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에는 당시의 상례가 송나라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느라 옛 예법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알고 이를 바로잡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이해하지 못한 유학자들이 글을 보내 비판하였습니다. 요사팟은 답장을 써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인용한 근거는 매우 풍부하고 문장은 뛰어나 이가환마저 읽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겠다."

 

그는 집안에서는 충직하고 성실했으며, 독실하고 공손하여 덕망이 고향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집안은 넉넉했지만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가난한 사람처럼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명성이 매우 높아 서울에 올 때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가마와 말이 끊이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한 번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이마르티노 등 대여섯 명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하고, 장차 배를 타고 중국 강절( 오늘날의 강소성(江蘇)과 절강성(浙江) 일대를 가리키는 말.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경제·문화 중심지였다 ) 지방을 거쳐 북경으로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직접 만나 새로운 학문과 기술을 배운 뒤 그것을 조선에 전하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가 된 뒤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뜻을 모았던 이들은 모두 훗날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남인이었고, 노론 가운데는 신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노론 가문 출신인 김요사팟은 천주교를 몹시 사모했지만 입교할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시골의 한 교우에게서 총령천신상(미카엘 대천사의 성화)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보고 천주교가 도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여, 한동안 강이천 등과 함께 술법을 익히기도 하였습니다.

강이천은 소북 지방에서 이름난 선비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인심이 이미 바르게 서지 못했으니, 이 나라는 끝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이 익힌 도술과 술법을 이용해 기회를 잡고 정권을 차지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요사팟은 그런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와 교류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김요사팟이 어질고 덕망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입교를 권하셨습니다. 그는 크게 감동하여 전에 배우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입교하였지만, 강이천만은 끝내 신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 강이천의 일이 발각되어 마침내 옥사가 일어났습니다. 문초 과정에서 김요사팟의 이름도 거론되었으나, 선왕은 평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보호해 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뒤 김요사팟의 신앙은 불꽃처럼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집안 어른들이 이를 알고 몹시 반대하였으므로, 3~4년 동안 집안에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비방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김요사팟은 용모가 단정하고 매우 겸손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오히려 순박하고 어수룩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인품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그를 공경하고 따랐습니다.

 

그가 체포된 경위와 박해 중에 어떻게 신앙을 지켰는지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처형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벼슬과 명예는 모두 헛되고 덧없는 것입니다. 나 또한 조금이나마 명예를 얻고 벼슬도 하였지만, 그것이 헛된 것임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오직 천주님의 가르침만이 참되고 영원하기에, 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뜻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는 끝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으며, 서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김백순(?~1801 순교, 세례명 미상)은 서울 사람으로 김건순의 친족형이었습니다.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지만,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의 선조 김상용은 영의정을 지냈으며,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끝까지 절의를 지키며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순절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사당과 정문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습니다.

 

조선에서는 궁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명나라 만력제와 숭정제를 제사 지냈습니다. 해마다 국왕은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의 후손들과 함께 제사를 올렸고, 예식이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과거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이를 '충량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백순만은 이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오늘 이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바라기 때문이오. 참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헐뜯고 비방하며 과거 공부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형세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내다보고 벼슬에 뜻을 접은 뒤,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리학 역시 모든 이치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고, 이어 노자와 장자의 책까지 탐독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사람에게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친구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그대의 주장은 너무 새롭고 기이하니, 틀림없이 서학에서 나온 것이오." 백순은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은 바를 사람들이 서학이라 한다면, 그 서학에는 반드시 깊은 진리가 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교우들과 가까이 지내며 여러 해 동안 교리를 배우고 토론한 끝에 천주교를 굳게 믿게 되었고, 계명도 엄격히 지켰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감화를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성격이 매우 강하여 남편이 벼슬길에 올라 이름을 떨치기만을 바랐습니다. 그 기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일가친척과 친구들까지 모두 그를 비난하였지만, 김백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숙까지 찾아와 거듭 타일렀습니다. 끝내 뜻을 꺾지 않자 외숙은 말하였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너와 절교하겠다."

 

그러자 백순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차라리 외숙과는 절교할지언정, 우리 주님과는 결코 절교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친구들은 하나같이 절교를 선언하는 편지를 보내왔고, 종중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천주님을 알고 난 뒤부터 내 마음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김건순과 같은 날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나이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천주교를 믿은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세례를 받지 못했으므로 세례명은 없었습니다.

 

이희영 루가(1756~1801 순교자)는 김건순 요사팟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처음에는 여주에 살다가 뒤에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화공으로 성화를 매우 잘 그렸으며, 신유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홍필주 필립보(1773~1801 순교자, 주문모 신부의 복사)는 강골롬바의 전처 소생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고 착하여 어머니를 따라 입교하였지만, 처음에는 신앙생활에 그다지 열심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를 모신 지 1년 만에 완전히 달라져,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늘 신부님의 미사를 도우며 복사로 봉사하였습니다.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관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과 일을 캐물으며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홍필주는 모든 고통을 끝까지 견디며 끝내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강 골롬바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재능과 분별력이 뛰어났고, 의지가 굳세며 용감하고 품성이 고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성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길을 알지 못해 다른 사람들을 따라 불교를 믿기도 했습니다. 열다섯 살쯤 되자 분별력이 생겨 그것이 참된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더 이상 따르지 않았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덕산 사람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우유부단하고 뜻이 맞지 않아 늘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세속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충청도에 천주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이름을 듣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다. 교회의 이름이 이처럼 바르니, 그 가르침 또한 틀림없이 참된 진리일 것이다." 그녀는 교리서를 구해 읽어 본 뒤 온 마음을 다해 천주교를 믿고 따랐습니다.

 

골롬바는 총명하고 부지런했으며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는 데에도 뛰어나 다른 사람들이 따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천주교를 권하고 가르친 영향은 가족은 물론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미쳤습니다. 하지만 남편 홍지영은 주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신앙을 권하면 "그렇지, 그렇지." 하며 따랐고, 천주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헐뜯으면 또 "옳다, 옳다." 하며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에게 꾸중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며 뉘우쳤지만, 나쁜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금세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골롬바는 아무리 애써도 남편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해박해(1791)가 일어나 고향이 혼란스러워지자, 마침내 논밭과 집은 남편에게 맡기고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곳에서 지사바(지황, 세례명 사바, ?~1795)가 맡아 하던 북경과의 연락과 왕래를 돕는 일에도 크게 힘을 보탰습니다.

을묘년(1795)에 세례를 받았는데, 신부는 그녀를 보자 크게 기뻐하며 여성 신자들을 돌보는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795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가장 먼저 피신 계획을 세우고 직접 실행에 옮겼습니다.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겨 정성껏 보호한 덕분에 포졸들이 집 앞까지 왔다가도 끝내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에는 신부가 아예 그녀의 집에 머물렀고, 골롬바는 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도맡아 도왔습니다. 그 때문에 신부의 신뢰와 사랑은 매우 두터웠으며, 그녀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안으로는 신부의 거처와 의복, 음식을 정성껏 돌보았고, 밖으로는 교회의 여러 업무를 맡아 공동체의 살림과 신자들 사이의 연락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또 많은 처녀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친 뒤, 교육을 마치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천주님을 믿도록 권하게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밤낮없이 다니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권했기 때문에 편히 잠을 자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말솜씨도 뛰어나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일 처리에는 결단력이 있었고 위엄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존경하며 어려워했습니다.

마침내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간 뒤에는 관리들이 신부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주리를 여섯 차례나 틀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목소리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형리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마침내 골롬바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때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습니다.

 

한편 선왕에게는 서형(庶兄)인 은언군 이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역모 사건으로 처형된 뒤,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마저도 사형에 처하라고 거듭 청했지만,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는 원래 살던 궁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신해년(1791)과 임자년(1792) 무렵, 한 여성 교우가 이들을 불쌍히 여겨 천주교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이 훗날 큰 화를 부를 것이라며 그들과 왕래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러나 골롬바는 스스로 그들을 찾아가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명도회에도 가입시켰습니다. 이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며 만류했습니다.

 

결국 이 사실이 발각되자 두 부인에게는 사약이 내려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함께 유배되어 있던 죄인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역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부인의 성과 본명은 오늘날 자세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최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의 정확한 순교 날짜도 알 수 없습니다.

 

조 베드로(조용삼, ?~1801)는 양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홀아비로 매우 가난하여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 갔습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는 서른 살이 가까워질 때까지도 관례를 치르지 못했고, 혼인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몸이 약해 늘 병치레를 했으며, 외모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세상일에도 서툴러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사람 대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 그의 열성과 진심을 알아준 사람은 정약종뿐이었습니다. 경신년(1800) 4월,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있는 이중배 마르티노의 마을을 찾았다가, 마르티노가 체포되는 바람에 부자가 함께 붙잡혔습니다. 관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던 중에도 베드로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관리가 노하여 말했습니다.

 

"네가 명을 따르지 않으면 당장 네 아버지를 때려죽이겠다." 그리고는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어 베드로가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매질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석방되어 옥문을 나서던 그는 이 마르티노를 비롯한 여러 교우들에게 권면과 격려를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돌이킨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에 관리는 크게 노하여 그를 다시 옥에 가두고 끝내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심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죄수들도 매를 맞았지만, 베드로는 유난히 가장 심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고을 원님은 그의 초라한 외모를 보고 쉽게 굴복할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신앙이 매우 굳건하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미워하여 끝내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열한 달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은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습니다. 훗날 반드시 더 자세히 조사하여 전해야 할 일들입니다.

 

베드로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습니다. 신유년(1801) 2월, 다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에는 천주님이 두 분일 수 없고, 사람에게도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는 것 외에는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관리는 다시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며칠 뒤, 베드로는 옥중에서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날은 1801년 2월 14일이었습니다.

 

이 루도비코(이존창, 1752~1801)는 충청도에서 천주교를 전했다는 이유로 공주에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기 전에 이미 배교한 상태였습니다. 죽음을 맞을 때 끝까지 신앙을 지켰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순교했다고 전하지만, 이를 확실한 사실로 믿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또 정산과 예산에서도 각각 한 사람씩 순교자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라도에서는 신해박해(1791) 이후 10년 동안 큰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교세가 널리 퍼져 신자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그러나 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 4월 초, 전주의 유 아우구스티노(유항검, 1756~1801)와 고산의 윤 프란치스코(윤지헌, 1764~1801)를 비롯하여 200여 명의 신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끝까지 신앙을 지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김제의 가난한 선비 한 스타니슬라오(한정흠, 1755~1801)와, 전주의 상인 최 마티아(최여겸, 1762~1801)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끝내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배교한 사람들은 대부분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수는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유 아우구스티노 형제와 윤 프란치스코는 전라도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곧바로 유배되지 않고 서울로 압송되어 갇혔습니다.

 

또 김 토마스는 체포될 당시 자신이 그들과 왕래한 사실을 스스로 밝혔기 때문에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후 옥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유배를 갔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외교인(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전한 말에 따르면 판결을 받고 처형된 사람과 옥중에서 숨진 사람을 모두 합하면 30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방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또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처럼 많은 사람이 처형된 해는 없었다고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 가운데 누가 순교했고, 누가 단순히 박해에 휩쓸려 희생되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처형하려 한 사람들은 지위가 높거나 학식이 뛰어난 천주교 신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신분이 낮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천주교를 믿는 줄 알아도 모른 체 넘어가거나, 심문하더라도 그다지 엄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의 평민들 가운데는 목숨을 건진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2월 보름날까지의 일은 모두 저희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이므로 비교적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전해 들은 소문에 의지한 것이어서 기록이 매우 간략하고 부족합니다.

 

순교자들의 행적도 직접 들었거나 평소 알고 있던 사실만을 간략하게 적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는 전체 내용을 모두 담은 것이 아니라 큰 줄거리만 기록한 것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내용은 감히 함부로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기록한 내용 가운데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의 체포와 순교

 

한편, 신부는 을묘년(1795)부터 줄곧 골롬바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때때로 다른 곳을 오가기도 했지만, 그 행선지는 오직 골롬바만 알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박해가 시작되자, 한 남자 교우가 상황이 매우 위급함을 알고 신부님께서 무사히 몸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곧 지방으로 내려가 숨어 지내는 교우들을 찾아보았고, 신부님께서 피신할 수 있는 적당한 곳 두 군데를 마련한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골롬바를 찾아가 신부님을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신부님의 안전을 지키고 박해를 피할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골롬바는 말했습니다. "이미 안전한 곳을 마련해 두었으니, 굳이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교우는 여러 차례 간청했지만 끝내 신부님을 만나 뵙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갔습니다.

 

5~6일 뒤 박해가 더욱 심해질 조짐이 보이자, 그 교우는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가족을 모두 데리고 멀리 피신했습니다.

 

한편, 정 아우구스티노가 관청에 붙잡혀 심문을 받을 때 신부님의 행방을 말하지 않자, 관리는 골롬바와 그의 아들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심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골롬바의 여종을 끌어다가 주리를 틀며 심문했습니다. 여종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실대로 말했으며, 신부님의 나이와 외모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관리가 골롬바에게 말했습니다. "네 여종이 이미 모두 말했으니 너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이다. 마땅히 신부가 있는 곳을 말하라." 골롬바가 대답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전에 우리 집에 계셨지만 오래전에 떠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디 계신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에 관청에서는 신부님의 얼굴 모습을 그려 현상금을 걸고, 각 지방에 수배하여 널리 찾도록 했습니다.

 

3월 중순, 신부님께서는 스스로 관청에 나아가 자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어느 집에 머물렀는지, 어떤 이유로 자수하셨는지, 정확히 언제 자수하셨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직접 의금부로 들어가시자, 옥졸들이 놀라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나 역시 천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지금 들으니 조정에서 성교를 엄하게 금하고 죄 없는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하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스스로 와서 죽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옥졸들이 신부님을 붙잡아 관리 앞으로 데려가니, 그가 바로 신부임을 알아보고 마침내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두 발에 족쇄만 채웠을 뿐, 형벌을 가하거나 심문하지는 않았습니다.

신부님께서 옥에 계실 때 글로 주고받은 문답이 매우 많았다고 전해지지만, 그 기록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을 얻어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비신자들이 전한 말을 들으면, 자수한 사람이 스스로 "나는 서양 사람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처형된 여섯 사람은 모두 역률(임금을 거역한 죄)에 따라 처벌받은 것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수하신 뒤,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들이 퍼졌습니다. "서양 사람이 옥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역적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있다." 또 다른 말로는, "서양 사람은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한 뒤에 죽음을 청하려 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4월 보름 이후 조정에서는 어영대장(수도 방위를 맡은 어영청의 최고 지휘관)에게 신부님을 군문효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병이 났다는 핑계로 사흘 동안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정은 그를 파면하고 새 어영대장을 임명하여 형을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하며 심문한 뒤, 무릎을 서른 차례 매질하고 수레에 태워 저자 거리에 모인 군중 사이를 지나가게 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길 양쪽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을 두루 둘러보시고, 목이 마르다 하시며 술을 청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졸들이 술 한 잔을 올렸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술을 다 마신 뒤, 마침내 성 남쪽 10리쯤 떨어진 연무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은 강변의 흰 모래밭으로, 그 지명을 노량이라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귀에 화살을 꿰고, 군졸이 죄목을 기록한 조서를 읽도록 받았습니다. 조서는 매우 길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조용히 끝까지 읽으신 뒤 목을 내어 형을 받으셨습니다.

 

때는 바로 4월 19일 성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 대축일로, 1801년에는 4월 19일이었다 ),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였습니다.

 

목을 베는 순간,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 장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한 교우(황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는 300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다른 한 교우(황사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는 400리 떨어진 곳에서 박해를 피해 피신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상한 바람과 천둥을 보고, 이날 반드시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날짜를 기억해 두었습니다. 훗날 주문모 신부님께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보니 바로 그때와 일치했습니다.

 

신부님의 머리는 닷새 동안 저자에 매달아 두었고, 밤낮으로 군졸들이 엄하게 지켜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후 대장이 명하여 흙으로 덮게 했지만, 지키는 일은 여전히 엄격했습니다.

 

교우들은 몰래 그 장소를 알아두었다가 훗날 시신을 옮겨 장사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관리가 다음과 같이 상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매장해서는 안 됩니다. 청하오니 파내어 다시 드러내 놓고 이슬을 맞게 하십시오." 대왕대비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매장을 명했던 대장이 간언했습니다. "이미 묻은 것을 다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 더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지키던 군졸들이 계속 지키는 일을 힘들어하여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겨 묻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지금까지 그 매장지를 찾지 못했습니다.

 

형을 집행할 때 형량을 선고하던 관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제주 사람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사실이 아니라,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그 처리 방법을 문의하지 않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뒤 박해의 기세는 조금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나 수색과 체포는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었고, 아직도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참형을 당할 사람이 앞으로도 아홉 명 더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해 들은 말일 뿐이어서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주문모 신부님께서는 조선에 들어오신 직후부터 곧바로 고발을 당하셨고, 이 사실은 이미 선왕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7년 동안 늘 마음으로 조심하고 염려하며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감히 성사를 널리 베풀지도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사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본래 많지 않았으며, 그 대부분은 여성 교우들이었습니다.

 

지방의 교우들과 서울의 상인들 가운데 열심한 신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실제로 성사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참고 견디며 오랜 세월 큰 기대를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형편이 너무도 불안하여, 비록 사사로운 집 안에서도 감히 "신부"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주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머리가 거리에 내걸린 뒤에야 비로소 신부님의 얼굴을 뵙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애써 기다리고 바친 정성이 하루아침에 헛된 일이 되어 버린 듯하여, 영혼과 육신이 모두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삶과 죽음을 의탁할 곳조차 없게 되어 모두 마음이 상하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우리나라에 오신 것은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찌 널리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을 구하려는 뜻이 없으셨겠습니까? 다만 여러 가지 장애와 어려움이 너무 많아 그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도 드러내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신부님께서는 순교하시어 하늘에 계시니,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은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욱 클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희망과 여러분이 품은 거룩한 기대는 오히려 이전보다 배나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때는 믿고 어떤 때는 의심하며,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달랬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예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박해는 그 참혹함과 혹독함이 오늘날 이 나라의 박해보다 더 심했지만, 성직자가 계속 이어졌고 성사의 은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고, 살아 있는 영혼들은 구원의 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형편은 너무나 달랐기에 그러한 희망을 품기가 어려웠습니다. 양은 목자를 잃고도 풀을 뜯으며 살아갈 수 있고, 젖먹이는 어머니를 잃고도 때로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아무리 깊이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다시 일어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 교회의 현실

저희들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땅에서 태어났지만, 다행히 천주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베풀어 주신 크신 은총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다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뜻밖에도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찍이 들으니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습니다. 그 섬나라 오랑캐는 잔인하고 혹독하여 스스로 천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여기며 장차 본받으려 하고 있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품이 온순하고 연약하며, 법과 기강도 점점 느슨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처럼 그렇게 가혹하고 잔인한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우들 가운데 학식과 식견이 높고 신앙의 의지가 굳센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이들이며,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헤아려 보아도 수천 명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이끌고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다시 일어나 발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형편으로 어떻게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십 년이 지나기 전에, 비록 다시 조정의 박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쇠하여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 참으로 슬프고 통탄할 일입니다. 죽기 전에 차마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모습을 어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올해 화를 면하게 된 것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깊습니다. 자비로우신 은혜로 힘껏 보호하시어 특별히 목숨을 보존하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희의 죄가 많아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참으로 이 남은 생명을 바쳐 주님을 위해 힘을 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혜도 부족하고 힘도 이미 다하였으니, 장차 원통함을 품은 채 땅속에 묻히고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나야 하겠습니까? 슬픔과 걱정이 너무나 절박한데, 누가 저희를 불쌍히 여기고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대야 주교님의 자비로운 앞에 나아가 눈물로 호소하고 싶지만, 산과 물이 가로막혀 우러러 바라보아도 이를 수 없으니 마음은 더욱 타들어 가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희들은 신부님께서 자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마음 아파하는 것 외에도, 또 하나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한 일이 있습니다. 혹시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중국 조정까지 알려지면, 그 영향이 북경 교회에까지 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의 교회는 다시 일어설 희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밤낮으로 조선 교회의 일보다 오히려 그 일을 더 깊이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주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교회의 근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희 죄인들도 목숨을 잃지 않았고, 요한(옥천희)도 무사한 것을 보면, 주님의 뜻이 이 나라의 교회를 주교님께 맡기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어찌 감히 마음속 깊은 간절함과 애통함을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 은혜를 어찌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하오니 저희가 모두 말씀드리는 내용을 굽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교우들은 더욱 가난하여, 굶주림과 추위만 겨우 면할 정도의 형편인 사람이 열 명 남짓에 불과합니다.

 

 

박해의 원인에 대한 성찰

 

갑인년(1794), 주문모 신부님을 맞이하는 일을 시작할 때에도 신부님을 모실 준비를 미리 충분히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조선에 오신 뒤에야 여러 일을 서둘러 마련하다 보니,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고 모든 일이 막히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물론 처음 겪는 일이어서 경험이 부족했던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가난하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입교하는 사람이 다소 늘었고 교회의 형편도 예전보다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또한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받아들인 결과 박해가 이처럼 혹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의 대부분은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데 있었습니다.

 

금년 박해 이후에는 화를 입은 사람들은 재산을 모두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몸만 겨우 피신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교우들의 형편은 오히려 갑인년(1794)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할 방법이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흩어진 뒤이지만, 재정만 갖추어진다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적지 않습니다.

 

교우들의 형편을 말씀드리면, 아직 발각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능력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아 서로 힘을 합치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정세를 살펴보면, 을묘년(1795) 이후 해마다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선왕께서 주문모 신부님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찾아내려 하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노론이 남인을 경계하고 미워하여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왕께서 의심하시던 대상은 이미 사라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없어졌습니다. 또한 교우들 가운데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이들도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금년만 지나면 박해도 점차 잦아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방의 사정을 말씀드리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법이 있어 교우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그 시행이 매우 엄격합니다. 그러나 교우가 살지 않는 곳에서는 오가작통이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므로, 사람들도 비교적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형편을 살펴보면, 경기·충청·전라 세 도에는 원래 교우가 많았습니다. 또 경상·강원 두 도에는 근래 박해를 피해 간 교우들이 더러 살고 있기 때문에, 관리들이 이 다섯 도를 두루 돌아다니며 수색하고 있습니다.

 

반면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본래부터 성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다른 지방에서 피신해 온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소문도 없고 조용하여 일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변문(국경 지역)에도 비록 조사와 감시는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두 해 동안 의심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차츰 경계가 느슨해질 것이므로 그때에는 일을 도모할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방책을 말씀드리면, 예전에는 교우들이 신앙을 널리 드러내는 데 힘썼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는 먼 장래를 내다보며 치밀하게 준비하고, 더욱 신중하게 자신을 지켜 교회를 보존해야 합니다.

 

이미 입교한 사람은 신앙 안에서 더욱 굳건히 성장하도록 돕고, 아직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은 꾸준히 가르치고 이끌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면, 성교를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며 아무런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갑인년(1794),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 오던 당시에는 교우들이 너무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긴 나머지 충분히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의 작은 실수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앞 수레가 이미 뒤집힌 일이 아직도 생생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스스로 잘못을 만들지 않는다면, 다시 환난을 불러올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형편이 이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도 결국은 재정이 마련되어야 비로소 논할 수 있습니다. 한 지역 교회의 존망과 수많은 영혼의 생사가 하찮은 재물, 곧 맘몬(재물을 뜻하는 성경의 표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저희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재정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성교가 무너지고 영혼들마저 구원의 길을 잃게 된다면, 그 원통함과 한스러움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북경교회에 드리는 요청

 

이에 감히 부족함을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오니, 바라건대 이 일을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에 사정을 알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성교를 보존하고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마련해 주신다면, 저희는 그것을 신중하고 올바르게 운용하며 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데 힘쓰겠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야 주교님께서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가련한 처지를 돌보아 주십시오.

 

저희도 이러한 청이 번거롭고 분수에 지나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한 채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다면, 또 청한다 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영원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비록 청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히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희는 몸과 마음의 모든 사정을 숨김없이 아뢰며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원하옵건대 주교님께서는 위로는 자비롭고 선하신 주님을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가난하고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는 연약한 저희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또한 저희의 간절한 희망을 너그러이 위로해 주시고, 이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이는 이 나라의 성교는 물론 수많은 영혼들에게도 더없는 은혜와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저희를 끝내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길을 열어 주신다면, 저희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며칠이나 몇 달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획하여 추진하려면 적어도 3년은 걸릴 것입니다.

 

국경을 드나드는 데에는 두 가지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머리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말입니다. 머리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자랄 수 있지만, 말은 쉽게 익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만 익숙하게 할 수 있다면 국경을 드나드는 일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먼저 북경 천주당으로 보내, 어린 젊은이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훗날을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방안에 대하여 주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허락하여 주신다면, 서로 약속한 암호와 신호를 사용하여 은밀하게 연락하고, 우선 동문에서 만나기로 정하였다가 여의치 않으면 다시 춘문에서 만나기로 한다면 일을 순조롭게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중국 교우 가운데 열심하고 매우 신중한 사람을 책문(柵門;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단둥 부근,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관문 ) 안으로 이주시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상점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게 한다면 사람의 왕래나 서신 전달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며, 그 밖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막다른 처지에 놓인 우리나라 교회와 신자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실행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 신부님께서 품으셨던 그 마음으로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반드시 기꺼이 받아들여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열심하고 신중한 분들과 널리 의논하시어 이 일을 반드시 이룰 수 있도록 힘써 주선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형편이므로, 어떤 일이든 황제의 명령이 내려오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교황 성하께서 중국 황제께 다음과 같은 뜻으로 글을 보내신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조선에 천주교를 전하고자 합니다. 들으니 조선은 중국에 속해 있으며 다른 나라와는 교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황제 폐하께서 조선에 특별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들이 마땅한 충성과 공경의 도리를 가르쳐 조선이 중국 황실에 더욱 충성을 다하고 황제의 은덕에 보답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와 같이 청한다면, 황제께서는 본래 서양 선교사들의 충성스럽고 성실한 모습을 잘 알고 계시므로, 허락하실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천자를 받들어 제후를 다스린다."는 계책과 같은 것으로, 교황 성하의 뜻을 조선에서 안전하게 펼칠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현재 형편으로 볼 때 이 계획이 실제로 실행될 수 있을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원하옵건대 이 방안도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에 베풀어 주신 천주님의 은총은 참으로 보통의 섭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전교하러 온 선교사가 없었는데도, 천주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이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이어서 성사를 베풀어 주실 분까지 보내 주시는 등, 이 나라가 받은 특별한 은혜는 이루 다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금년에 닥친 이 박해는 참으로 저희 죄인들의 허물을 징계하시려는 주님의 뜻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의 크신 자비로 저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이처럼 참혹하게 무너진 가운데서도 특별히 한 줄기 살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이 나라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표징이라 믿습니다.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와 같으니, 만일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도와준다면, 어찌 이 재앙을 복으로 바꾸지 못하겠으며, 이 작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겠습니까? 저희들은 바로 이러한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다른 이들을 위로하며,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 내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주교님께서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하루속히 저희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엎드려 듣건대, 근년 들어 중국 서쪽 지방에서는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관군은 여러 차례 패하여 영토마저 날로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중국 황제께서도 틀림없이 깊은 근심과 걱정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혹시 말을 잘하고 국정을 깊이 헤아릴 줄 알며, 평소 황제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안전할 때에도 멸망의 가능성을 잊지 않는 것이 예로부터 변하지 않는 이치입니다."

 

청나라는 동쪽 변방에서 일어나 천하를 차지한 지 이제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천하의 형세란 흥하고 쇠하며,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일이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훗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잘못이 있어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응당 청나라의 발상지인 영고탑(寧古塔, Ningguta)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고탑은 땅이 좁고 외져 오래 머물 만한 곳이 아닙니다.

 

조선은 영고탑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어서, 사람 사는 마을이 서로 바라보이고 큰 소리로 부르면 서로 들릴 만큼 가깝습니다. 그 땅은 사방 3천여 리에 이릅니다. 동남쪽은 토지가 비옥하고, 서북쪽은 군사와 군마가 강하며, 천 리에 걸쳐 이어진 산에는 목재가 무궁무진합니다. 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물고기와 소금이 끊이지 않으며, 경상도에는 인삼이 많이 나고 탐라에는 뛰어난 말이 많습니다.

정치적 제안

이처럼 조선은 여러 생산물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씨 왕조는 국력이 이미 크게 쇠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대왕대비가 섭정을 하고 권세 있는 신하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은 탄식과 원망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러한 때에 조선을 황조의 속국으로 편입하도록 명하시고, 황조와 같은 의관과 제도를 따르게 하며, 왕래를 자유롭게 하여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키고 황조의 근본이 되는 지역을 넓히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안주와 평양 사이에 안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하고, 왕에게 직접 명하여 그 지역을 다스리고 보호하게 하십시오.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면, 훗날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더라도 요양과 심양 동쪽 지역을 근거지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은 지세가 멀고 험하여 방어하기에 유리하므로, 군사를 모아 훈련시키다가 기회를 보아 움직인다면 청나라 황실이 오래도록 이어질 기반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들으니 조선의 임금은 아직 나이가 어려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일 청나라 황실의 여인을 공주로 삼아 조선에 시집보내 왕비가 되게 한다면, 지금의 임금은 황실의 부마가 되고, 다음 임금은 황실의 외손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조선은 자연히 황조에 더욱 충성을 다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몽골을 견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에 다른 세력이 먼저 그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그 나라가 안정을 이루고 군사력까지 강해진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까운 장래에 큰 근심거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때가 왔는데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훗날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황제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이 일을 시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강 이러한 뜻으로 아뢰되, 중국 조정의 형편에 맞게 내용을 적절히 조정하여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중국 황제께서 이를 받아들이시고, 성교를 믿는 이들이 그 사이에서 일을 돕는다면, 성교는 차츰 크게 퍼져 마침내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형세에 이를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에는 이미 교우들이 많고, 황실과 접촉할 수 있는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께 아뢸 방도가 전혀 없겠습니까? 듣건대 몇 해 전 칙사로 조선에 왔던 영학사는 황후의 친척이며, 주교님과도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또 그 집 하인 가운데에도 교우가 있다고 하니, 혹시 그러한 인연을 통하여 이 계획을 신중하게 추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황제께서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실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명분도 없이 조선을 황조의 속국으로 삼으라고 명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조선에 책망할 만한 허물이나 구실이 생긴 뒤에야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는 공정하지 못하고 법도를 어긴 일이 매우 많아, 감히 하나하나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사로이 시헌력( 청나라의 역법에 따라 만든 달력 )을 만들어 시행한 일과 상평통보를 주조한 일, 이 두 가지는 중국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문제 삼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만 조사하더라도 조선을 문책할 충분한 명분이 될 것입니다. 이 계획은 본래 중국 황실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도 결코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는 형세가 매우 위태로워 오래 버티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그러나 만일 중국의 속국이 된다면 간신들의 전횡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며, 이씨 왕조의 권위와 위세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교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오히려 나라 전체의 복이 될 것입니다. 부디 이 말을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야기로 여기지 마시고, 깊이 헤아려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보내 주신 편지에서 몇 해 뒤 큰 배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은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형세가 크게 달라져, 그렇게 무턱대고 오신다고 해서 뜻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에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이 방법이라면 조선 조정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 없이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그 내용은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나라의 군사력은 본래 매우 약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뒤떨어집니다. 더욱이 200년 가까이 태평한 세월이 이어지면서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나라를 이끌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나라를 바로 세울 어진 신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큰 변고가 일어나더라도 흙더미가 무너지듯, 기와장이 부서지듯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예병 5~6만 명을 보내고, 대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충분히 갖추게 하십시오. 또한 글에 능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함께 보내어 곧바로 조선 연안에 이르게 한 뒤, 국왕에게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서양에서 선교를 위해 온 배입니다. 사람과 재물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을 받아 이 나라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귀국이 선교사 한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탄환 한 발, 화살 한 대도 쏘지 않을 것이며, 티끌 하나, 풀 한 포기조차 해치지 않고 영원한 우호 관계를 맺고 기쁘게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할 것이며, 죽음을 각오하고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왕께서는 선교사 한 사람을 받아들여 나라 전체에 내릴 재앙을 막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선교사 한 사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느 쪽을 택하실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천주교는 충성과 효도, 자애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가 이를 믿고 따르게 된다면, 그것은 조선에 더없는 복이 될 뿐, 우리에게는 아무런 사사로운 이익도 없습니다. 바라건대 부디 의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서양 여러 나라가 참으로 천주님을 공경한 결과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고 나라를 잘 다스려 왔다는 사실을 예로 들고, 동양 여러 나라 역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 해로운 점은 없다는 사실을 거듭 설명한다면, 조선도 마침내 두려워하며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병력의 규모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갖추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않다면, 전선 수십 척과 병력 5~6천 명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이루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몇 해 전 서양 상선 한 척이 우리나라 동래에 표류하여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교우가 그 배에 올라가 자세히 살펴본 뒤 돌아와 말하기를, "그 배 한 척이면 우리나라 전선 백 척과도 충분히 맞설 수 있겠더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주교를 이처럼 혹독하게 박해하는 것은 본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서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당파 싸움이 극심하여, 천주교를 상대를 배척하고 모함하는 구실로 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지나치게 편협하여, 오직 성리학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기들과 다른 것이 있으면 곧 천하를 뒤흔들 큰 변란으로 여깁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깊은 시골에서 방 안에서만 자란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놀라 크게 우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바로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의심과 두려움이 많고, 어리석고 무지하며, 성품 또한 몹시 나약하여 천하에서 견줄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신부님께서 자수하신 뒤에도, 조정에서는 교우들이 소요를 일으킬까 두려워 오랫동안 감히 형을 집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교우들이 끝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의심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 두려움이 남아 있는 이때에 강력한 군사적 위세를 보인다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이치를 차근차근 깨우쳐 그들의 편협한 생각을 깨우쳐 준다면, 조선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먼저 이해득실을 따져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위세를 두려워하고 평안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끝내 이를 단호히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계획은 실행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일단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허점 없이 성공할 것입니다. 만일 실행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부디 힘을 다해 추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계획이 비록 실행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성교가 내세우는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다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저희 죄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맺음말

이 나라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순교한 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마침내는 성교의 신부님과 나라의 대신들까지도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은 억지로 그들에게 역적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웠지만, 실제로는 털끝만 한 불충의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어질고 올곧은 삶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이 나라의 교우들이 소란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모범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서양은 성교의 본거지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 받아들여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작은 나라만이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성교를 심하게 박해하고 성직자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지난 200년 동안 동양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묻는 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따르면,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도 더 무겁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이 나라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성교의 명예를 해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말씀드리는 계획은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큰 위세를 보임으로써 성교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백성을 해치지도 않고 재물을 빼앗지도 않으며, 오히려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는 것을 본보기로 삼으려는 것이니, 이는 성교의 훌륭한 모범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 어찌 명분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그 일을 실행할 만한 힘이 부족할까 염려될 뿐입니다.

 

어떤 이는 또 이렇게 하면 그 사실이 중국 조정에 알려져 북경 본당에까지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것 또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곧 중국 조정에 보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면 될 것입니다.

 

"교황께서 일찍이 아무개 신부를 조선에 보내 성교를 전하게 하셨으나,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끝내 그를 죽였습니다. 이제도 끝내 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절을 급히 보내 그 죄를 중국 조정에 알리고, 죄를 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뜻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조선은 예전에 중국 사람을 사사로이 죽인 사실이 드러나 중국 조정의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이 일을 먼저 보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또한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책문 안에 점포( 장사가 목적이 아니라 비밀스런 선교 거점을 만들려 했다 )를 여는 일은 지금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니,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질수록 더욱 좋겠습니다.

그 밖의 계획들도 앞으로 3~4년 안에 차례로 추진하여야 비로소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나면, 그 뒤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호소

저희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마치 한 해를 보내는 것처럼 길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힘이 없어, 다만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기다릴 뿐입니다.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하루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번 박해로 이름이 알려진 교우 가운데 화를 면한 사람은 매우 드물며, 살아남은 이들도 몸을 숨기고 자취를 감춘 듯 살아야만 성교를 지킬 수 있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떠돌아다니고, 어떤 이는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옮겨 다니는 등, 길 위를 떠도는 교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들은 이동할 때마다 신앙이 드러나기 쉬우므로 감히 청하오니, 오늘날 우리나라 교우 가운데 박해를 피해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대소재를 막론하고 모두 관면해 주시어, 몸을 숨기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생명을 보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까.

 

또 어떤 교우는 지난 고해성사 때 다음 고해성사 때까지 한 주에 이틀씩 대재( 금육과 금식을 지키는 날 )를 지키기로 서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박해가 일어난 뒤 집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피신하여 떠돌아다니다 보니, 산골에서는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고 객지 생활도 몹시 어려워 부득이하게 재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서원하고도 이를 지키지 못한 죄가 있을까 두렵사오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울러 이미 지키지 못한 일 또한 죄가 되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끝인사

천주 강생 후 1801년, 시몬과 다대오 사도 축일 다음 날에, 죄인 토마스 등은 두 번 절하며 삼가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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