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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信者)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

​황사영 백서

주1

황사영 백서 현대어로 읽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編

 

주교님께 올리는 눈물의 호소

 

저희(원문: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저희를 돌보시는 주교님(탕사선湯士選, 포르투갈 출신 북경교구장 Alexandre de Gouvea의 중국식 이름)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지난봄 길을 떠난 사람을 통해 주교님께서 평안히 지내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여러 달이 지나 이제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교님께서는 주님의 크신 은총 안에서 영육이 모두 평안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사목의 열매가 날로 더욱 풍성해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희는 이를 생각할수록 더욱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축하와 문안을 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와 허물이 크고 무거워 위로는 주님의 노여움을 샀고,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아래로는 사람들의 신뢰마저 잃었습니다. 그 결과 박해가 크게 일어나 마침내 신부님(주문모周文謨)께까지 그 화가 미치고 말았습니다.

 

또한 저희는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목숨을 바쳐 스승과 함께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감히 붓을 들어 주교님께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엎드려 생각건대, 지금 성교(聖敎)는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신자들은 박해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어 의지하고 호소할 곳조차 없으며, 형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성교를 돌보고 이끌 사람이 없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희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으시며, 사목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이토록 절박한 처지에서 저희가 달리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박해의 경과를 간략히 아뢰고자 합니다. 일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얽힌 사정도 매우 많아 간단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래에 차례로 자세히 적겠사오니, 부디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해 이후의 참상과 구원을 청하는 호소

조선 교회의 상황

이제 성교는 무너져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희만이 다행히 화를 면하였고, 요한(옥천희, 若望)도 아직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이 나라에서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거하였고, 살아 있는 저희는 마땅히 죽음으로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주가 부족하고 힘이 미약하여 어찌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저희는 몇몇 교우(황사영, 황심, 옥천희)와 함께 당면한 일을 깊이 의논한 끝에, 저희가 세운 계획을 아래에 조목조목 아뢰고자 합니다. 부디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는 저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속히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는 마치 흩어진 양 떼처럼, 어떤 이는 산골짜기로 몸을 숨기고, 어떤 이는 의지할 곳조차 없어 길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도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슬피 울 뿐입니다.

 

괴로운 마음은 뼛속까지 사무쳤습니다. 밤낮으로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주님의 전능하심과 주교님의 크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저희를 위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해 주시고,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이 모든 환난에서 저희를 구하시어 다시 평온한 삶을 되찾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 성교는 이미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되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 또한 돌이켜 생각하면, 누가 주님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역이 멀고 외져 성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으며, 백성들의 형편 또한 연약하여 오랜 시련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눈물과 근심 속에서 살아왔는데, 올해의 참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어찌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겠습니까? 이번 박해 이후에도 주님의 은총을 입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이 장차 이 나라에서 아주 끊어질까 두렵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합니다. 중국과 서양의 교우들이 이 위태롭고도 비참한 사정을 듣는다면, 어찌 저희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감히 바라오니, 이 사정을 교황님께 자세히 알리시고 여러 나라에도 널리 알려 주십시오. 또한 저희를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을 본받고, 성교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이를 사랑하시어 저희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며 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합니다. 오직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부디 주교님께서는 글로 다 아뢰지 못한 저희의 사정을 깊이 헤아리시어 가엾이 여겨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박해의 시작

을묘년(1795), 주문모(周文謨) 신부님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끝내 놓치고 만 뒤부터, 선왕(정조)은 성교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날로 더해 갔습니다. 관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철저히 수색하였지만, 신부님에 관한 작은 단서조차 얻지 못했고 끝내 그 행방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록

이에 조화진이라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성교를 믿는 척하게 한 뒤, 호서 지방(충청도)의 성교 사정을 몰래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미년(1799) 겨울 청주에서 박해가 일어나, 충청도의 열성적인 교우들이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는 중인 출신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리를 중히 여겨 재물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교에 대한 열성이 남달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해년(1791) 박해 때 체포되어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성교를 배반하였습니다.

 

선왕은 이를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혼인을 허락하고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토마스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으나, 그 뒤로는 세상일을 멀리한 채,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언제나 목숨을 바쳐 그 죄를 보속하기를 바랐습니다.

 

기미년(1799) 8월, 선왕은 그를 갑자기 형조로 불러들여 물었습니다.

"네가 아직도 사학(邪學) 을 믿고 있느냐?"

토마스는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때가 왔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이제야말로 성교를 위해 죽을 때라고 생각하고, 성교의 충효를 밝히고 진리를 힘 있게 증언하며, 지난날 배교를 깊이 뉘우치는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당당하고도 힘이 있어 곁에서 듣던 사람들까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형조의 관리들은 크게 놀라고 노하여 그 사실을 곧바로 임금께 아뢰었으나, 선왕은 더 이상 형벌을 내리지 않은 채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를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토마스를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끝내 분명한 명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포용하려는 뜻을 보였습니다. 결국 그 일은 더 크게 번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중배 마르티노(李重培, 1801년 순교)는 소론 계열의 서출(庶出)로, 경기도 여주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용맹하고 힘이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 또한 매우 호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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